<1조 김철현>
원채 느긋한 성격이라, 엄마 뱃속에서도 보름이나 늦게 나온 나. 비행기가 바퀴를 접는 그 순간에도, 오타루에서의 여유있는 생활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얏빠리. 이곳에서 느긋하게 하루를 맞이하는 것은 사치였다. 러브레터 속의 풍경보다도 아름다운 곳들이 얼마나 많은데, 가봐야 할 식당이 그렇게도 많은 데, 편의점도 매일 가봐야 하는 데 여유라니, 이 자식아.
잠과 커피를 어찌나 참았던지, 제가 잠만보였고 예상보다 훨씬 더 커-덕이었던 것이 귀국하고서 밝혀져 내심 뿌듯했습니다. 아사히카와에서 황제펭귄을 보기 위해, 삿포로행 기차에서 멍하니 이시카리 만을 바라보기 위해, 운하식당에서 하마짬뽕을 먹기 위해서 탈-만보하고, 탈덕을 해야만 했던 18박19일이 막을 내렸습니다.
사실, 해외 봉사활동이 처음은 아닙니다. 세 번의 해외봉사를 했었지요. 놀랍게도 그 경험들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라면 아마 공감하실 수도 있을 거에요.
(MBTI와 애니어그램으로 INFP 4w5입니다만.)
1) 생각지도 못한 물건들을 잔뜩 싸 들고 귀국한다.
2) 그러면서도 꼭 뭔가 하나씩 놓고 온다.
3) 비행기가 이륙함과 동시에, 한국에서의 고민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게 된다. 그 느낌이 좋다.
4)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면, 몇 가지 고민들이 자연스레 해결되어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5) 안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도 술을 많이 마시게 된다.
6) 말도 안 되게 생생한 추억들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게 된다. (매일 오타루/오코보 꿈을 꿉니다.)
7) 독특하고도 미묘한 포인트에서 감동을 받고, 내 인생일대를 뒤흔드는 사건이 된다.
8) 여권에 도장이 하나 더 찍힌다.
9) 어딘가 한 군데가 고장이 난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독감에 걸렸고, 미얀마에서는 엄지발톱이 빠졌다.)
놀라웠어요. 아홉 가지 모두 다 일치했거든요. 세 번의 경험들이 어쩜 같을 수가!
1번부터 9번중에 어딘가 함정이 있어 보이지만, 착각일거에요. 저는 다 좋았어요. 발톱을 놓고 왔어도요. 오코보 활동도 결국엔 행복한 경험들이었습니다. 발가락에 문제가 있긴 했지만요.
모두들 뭔가 잃기를 감수하고 온 곳인 만큼, 얻는 것도 많았겠지요?
전 1조 가족들을 얻은 게, 토치로 불을 한 번에 켠 것 마냥 좋았어요. 얘네들은 오타루의 모든 풍경과도 바꾸기 싫어요. 오그라들어도 어쩔 수 없어요, 사실이니까.
우리 1조에 대해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에게서 중요한 순간을 꼽자면, 저는 지선이가 주선한 ‘겨울 고백’이 먼저 떠오를 거예요. 겨울 고백이란 ‘불만 말하기 시간’을 말합니다.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숙소를 같이 쓰다 보면 화음이 삐걱거릴 때가 있겠죠? 그런 불협화음들을 터놓고 얘기하고,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자는 취지의 시간이었습니다. 모두들 진지했고, 경청해주었어요.
“오빠는 뒷사람이 기다리는데, 왜 음악을 틀어놓고 느긋하게 씻는지 모르겠어.”
“사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그때그때 알기 위해 켜두는 거야. 빨리 씻으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해. 음악 때문에 느긋하게 보였던 건 미안하게 생각해”
…
우린 서로 불편하게 느꼈던 것에 대해 하나하나 말하기 시작했고, 짧은 시간에 서로에 대해 많은 걸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그 시간이 없었으면 어땠을까’라며, 한 달이 지난 지금도 곰곰이 생각해봐요.
‘아마도 불만이 쌓이고 쌓여서 언젠가 폭발했을지도 몰라. 결국 끝까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겉으로만 친해진 채로 돌아왔을 지도 몰라.’
그리고 그 순간을 지금에서야 다시 평가해봅니다.
‘맞아, 우리 조가 격랑에 빠졌음에도 함께 견뎌낼 수 있었던 건, 그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야. 조원들 모두 숨지 않고 본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지금에서야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아졌어.’
요즘, 잠들기 전에 습관적으로 오타루에서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봅니다. 시간 순으로 떠올릴 때도 있고, 장소를 옮겨가며, 두 친구만을 떠올릴 때도 있어요. 주로 시간 순으로 되뇌어봅니다. 설레다가, 미소 짓다가, 춥다가, 웃다가… 결국 마지막엔 눈물이 흐르더군요. 아마도 그 날의 일 때문이 아닐까요.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음에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 조장으로서 강하게 어필하고 부딪혀야 할 때를 놓친 것이 마음 한 켠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불만과 원성을 묵묵히 참으며 들어줄 수 밖에 없던 순간이 아련합니다. 같이 울며 아픔을 옆에서 보듬어준 조원들, 그리고 일정을 끝까지 마친 두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요.
인심 좋은 카페 사장님께서 넉넉하게 올려준 까페라떼의 휘핑크림처럼, 오타루에서 본 첫 눈은 부드럽고 따뜻했습니다. 그 눈 내리는 풍경과, 오코보 친구들을 생각하며 올 한 해를 헤쳐나갈 힘들을 얻어냅니다. ‘철현한’ 조장이기에 이 기회에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후련하네요.
오코보에 지원하기 전에 이 글을 보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왜냐면 제가 그랬거든요. 공통점 6번, 7번만 기억하시고 지원해보세요. 나이 먹으면 추억을 뜯어먹고 산다는 말도 있잖아요? 추가합격이어서 어떻게 조원들과 친해질까 걱정하고 계신 분도 있겠지요. 저는 11월에 합격소식을 받았답니다. 이때는 공통점 4번을 기억하세요.
‘낯선 조원들의 모습’이 곧 낯설어질 거예요. 망설이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