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4-08 21:26
[9기] OKOVO 활동 후기
 글쓴이 : 12김수진
조회 : 2,653  




<8기 여환수>

오타루. 듣기만 해도 심장이 뛰고,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 이름. 눈 감으면 펼쳐지는 하얀 눈의 세상과 어둠을 밝히던 환한 촛불, 그리고 하나 둘 씩 떠오르는 그리운 얼굴들과 미소들.

  흔히들 인생을 살면서 세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고들 말한다. 나에게 그 기회들 중 하나는 바로 오타루를 알게 되고 오코보 가족을 만난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처음 오코보를 알게 된 계기는 2009년 어느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모집 글을 본 것이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때 느꼈던 흥분과 짜릿함. ‘아, 이거야말로 내가 찾아 헤메던 봉사활동이다!’라고 내 심장이 큰소리로 말해주었다. 난 어떻게든 합격하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여 자소서를 썼다 지웠다를 몇 번이나 반복했고, 지원서 제출 후에는 합격 발표 날 까지 얼마나 마음 졸이며 오코보 홈페이지를 들락날락 했는지 모르겠다. 나의 갸륵한 마음을 알아 본 것인지 내 진심이 심사원들에게 전해진 것인지, 난 정말 운이 좋게 합격을 했고, 그렇게 내 인생에 오코보, 그리고 오타루라는 카테고리가 추가되었다.

  그렇게 난 오코보 8기로 ‘제 12회 오타루 유키아카리노미치’에 참가할 수 있었고, 그 곳에서 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들과 인연들을 얻었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바로 이웃하고 있어서 도쿄에 몇 번 가본 경험도 있고, 딱히 이색적으로 느껴진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해 우리를 맞이한 하얀 눈의 세상을 본 순간, 나는 마치 별세계에 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소설 ‘설국’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그 소설의 첫 장면, 기차가 터널을 뚫고 하얀 눈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그 장면을 한 번 쯤은 상상해 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설국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된 것이다. 그 때 느꼈던 황홀한 첫 인상은 지금도 나의 뇌리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하지만 황홀했던 것은 비단 첫 인상 뿐만이 아니었다. 축제 시작 전 설상 제작 작업은 물론, 축제 기간 내내 이루어지는 보수작업이나, 촛불 점화, 관광객 안내 등등 모든 일들이 너무나 색다르고도 값진 경험이었다. 물론 몸은 힘들고, 추운 날씨 탓에 두 볼이 빨갛게 얼기도 하고, 때로는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눈보라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릴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 일수록 서로를 다독이고 격려하면서 오히려 더 잘 해 나갈 수 있었다. 또한 축제 기간 중에 만난 한국 관광객 분들의 힘내라는 격려 한마디나, 일본 관광객 분들의 고맙다는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얻기도 하고, 일본 자원 봉사자 분들의 진심어린 배려나 우리를 향한 모든 친절에 감사한 마음으로 마지막 날 까지 지치지 않고 힘내서 달릴 수 있었던 것 같다.

  그저 모든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가득했다. 가깝지만 먼 이웃나라 일본이라는 타국에서 우리는 한동안 잊고 살았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情)이 무엇인지,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말이 통하느냐 통하지 않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모든 이들의 얼굴엔 항상 웃음이 떠나질 않고, 서로를 향한 배려와 따뜻한 마음만으로도 우린 국경을 넘어, 나이를 넘어 모두가 한 가족이자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20여일이라는 시간이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되었을 때는 어느새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정들어 버려서 이별의 아쉬움에 울기도 하고, 서로 안아주기도 하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아쉬운 이별을 맞이해야했다.

  그리고 1년 후, 그리운 사람들이 있는 그 곳, 소중한 추억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그 곳, 오타루로 다시 발걸음을 향했다. 당시 난 교환학생으로 도쿄에서 생활 중이었고, 학사 일정으로 한국에서 출발하는 오코보 멤버들보다 조금 늦게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한국에서 오코보 멤버들이 출발하기 전부터 이미 오타루에 도착해있었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오타루 생활은 시작되었다.

  두 번째 오타루에서의 생활은 첫 번째의 그것과는 아주 많이 달랐다. 우선 나는 OB로 참여한 것이기 때문에 책임감을 가지고 YB들이 오타루에서 잘 생활할 수 있도록 잘 도와야했고, 또한 일본어 특기자 자격으로 참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 오코보 측과 일본 자원봉사단원들 간의 중간다리 역할도 잘 소화해내야 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부담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감사함으로 내게 다가왔다. 내가 받았던 많은 것들을 새롭게 오코보 가족이 된 이들에게 느끼게 해줄 수 있다는 감사함, 그 중요한 역할을 내가 해낼 수 있다는 감사함, 또 다시 그리웠던 오타루에 왔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함, 여러 가지 나의 사정을 헤아려주고 OB로서의 참가를 허락해준 운영진에 대한 감사함, 1년 만에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환한 미소로 다시 나를 반겨준 일본 자원봉사자 분들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늦게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 한 번 본적 없던 나를 정말 격하게 환영해주고 잘 따라주었던 가족 같은 우리 조원들에 대한 감사함 등. 정말로 모든 것들이 감사하고, 가슴 벅찼다.

  간혹 주변에서 “왜 두 번씩이나 똑같은 봉사활동에 참여하느냐? 거기다 네 돈까지 써가면서 그렇게 오랜 시간 다녀올 바에야 다른 봉사활동이나 인턴을 해서 스펙을 더 쌓는 게 좋지 않겠느냐?” 라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아마 그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오코보 가족을 만나기 전엔, 오타루에서의 꿈같은 시간을 경험해 보기 전엔. 그래서 그럴 때면 난 그냥 웃으면서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라고 대답하고 만다. 아무리 내가 길고 장황하게 설명해봤자, 말로 그 모든 것들을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리고 이 글을 읽게 될 예비 오코보 가족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만약 스펙을 쌓으려고, 혹은 그냥 여행 간다는 생각으로 지원하는 것이라면 그냥 차라리 지원하지 말기를. 찾아보면 얼마든지 좋은 조건에 자비 안들이고 갈 수 있는 봉사활동 프로그램은 널리고 널렸다. 당신이 오코보 가족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열정, 그리고 진실되고 열린 마음이다. 그러나 행여 스펙 쌓기를 목적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운이 좋아 자소서로 자신을 속여 오코보 단원이 됐다 한들, 그 마음 그대로 오타루에 가게 된다면 당신은 오타루에서 아무 것도 얻어갈 수 없을 것이다. 당신에게 굴러들어 온 어마어마한 행운을 당신 스스로 걷어 차버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당신의 온 열정을 쏟아 부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평생을 함께 할 새로운 가족이 갖고 싶다면, 오코보의 문은 당신에게 활짝 열려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진심은 전해지는 법이니까.

  내가 느꼈던 그 모든 황홀함, 감사함, 따뜻함, 행복함, 아련함... 오직 나만 느끼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부족한 실력으로나마 몇 자 글을 적어보았다. 부족한 글 실력 탓에 그 모든 감정을 이 글에 담아낼 수는 없었지만,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느낌들을 함께 하게 될 새로운 가족을 기다리며 글을 마친다.



<9기 김아람>

“19일동안”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OB 오빠의 그 말- “이렇게 힘든 게, 한국가면 생각 하나도 안 나~”.
한국에 와서야 나는 저 말을 몹시 공감하고 있다. 반 년이란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막연한 그리움으로? 아니-. 난 나의 2011년 2월에, 평생에 걸쳐 마법을 걸어놓은 것이다.
희미해져 가는 오타루의 기억 속에 아직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단연 윈켈에서의 생활들. 그리고 내 모든 기억 속, 그 중심엔 우리 E조가 있다. 아기자기했던 B-2동 생활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하루하루 어떻게 지나갔는지, 그때의 시간들이 꿈만 같이 느껴진다. 어렴풋이 조원 한 명 한 명의 색깔이 느껴진다. 제일 좁은 통나무집에서 복닥복닥 지내느라고 별별일이 다 있었다. 이상형 월드컵에서 인기가 좋았던 우리조 OB오빠들과 옮아버릴 것만 같은 말투 종경이 오빠, 동갑내기 원국이,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 깜찍해 깨물어주고 싶은 우리 귀여운 언니들과 생각 깊고 말 잘 듣고 따라줘서 고마웠던 혜미, 지영이, 수윤이…. 그렇게 열 명이 모일 수 있었던 것에 가장 큰 의미를 두기에 오코보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 전국 팔도에서 만나기 힘든 사람들과 이렇게 19일을 함께 보낼 수 있었으니까.



<9기 김헌욱>

오코보... 작년 친구가 같이 지원하자고 해서 인터넷에서 본 오타루 눈빛거리 축제 자원봉사자 모집 홍보를 봤던 기억이 난다. 동영상에서 본 하얀 눈의 세상 오타루와 모두가 빨간색 옷을 입고 삽과 양동이로 뭔가를 웃으며 열심히 만들던 모습 너무 잼있어 보여서 한번쯤은 해보고 싶어서 지원했었는데 그걸 정말로 내가 그 장소에서 할 줄은 몰랐다. 특히 동영상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 8기 환수형을 오타루에서 정말로 볼 줄은 몰랐다. 선발되었다는 연락과 그 이후의 한여름의 OT 그리고 한겨울의 MT. 난생 처음 일본에 간다고 바리바리 짐도 싸고 새벽부터 인천공항을 향했던 것들 후기를 쓰는 지금 신기하게도 모두 얼마 전 일같이 생생히 기억이 난다.


우리가 일본에 가는 날까지 함께 있어줬던 OB들이 왜 또 가고싶다 같이 가고싶다고 한없이 이야기 했는지 그 당시엔 몰랐지만 갔다와서 후기를 쓰는 나 역시 그때 갔던 사람들과 다시한번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오타루에서 즐거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며칠간 설상을 만들고 매일매일 설상을 보수하는 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내가 왜 일본까지 와서 눈과 삽질 싸움을 해야되지? 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함께온 우리조 1조와 50여명의 오코보인들이 함께 웃으며 만든 설상이 완성되는 순간 그리고 밤에 촛불속에 사람들이 우리의 설상속에서 웃고 즐기며 사진을 찍는 순간 뭔가 모를 보람도 느끼게 되었다. 힘든 설상과의 싸움으로 지친몸이지만 윈켈에 돌아오면 금방 활기를 되찾고 웃으며 야식도 만들고 게임도 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나는 철인들로 보였다. 나도 물론 같이 즐기기는 했지만 이러한 철인이 되기 위해 스팀팩 홍삼을 애용했다는... 1조와 2조 사이의 급경사와 아사리강 쪽의 설매장에서 설매를 타던것, 너무나 좋았던 무사시와 클라세 호텔온천에 갔던것. 그리고 성민형과 함께 핸드메이드로 내려먹던 모닝 커피, 발렌타인 데이 윈켈에서의 야밤의 운동회? 등 너무나도 재미있는 일이 많았기에 눈과 추위속에서 설상과의 싸움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가서 일본어 공부 좀 미리할껄 이란 뒤늦은 후회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르겠다. 말이 안통해서 답답했지만 설상작업 중 친구가 된 스즈끼상과 함께하며 나도 모르게 일본어를 배우게 되고 또 한국말을 가르쳤다. 내가 눈꽃 잘만든다고 雪花스페셜리스트라고 하며 나만 맨날 눈꽃만들게 한것에 대해선 쬐끔 괴로웠지만처음보는 외국인에게 내가 인정받고 있다는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이 한곳에 모여 얘기하니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 4개국어가 마구 혼재하며 이말 저말 막 섞여 뒤범벅이 되었지만 이상하게 서로서로 알아듣고 말하는게 새로우면서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돌아오기 전에 정든 일본일들에게 뭔가 해주고 싶은데 마침 내가 입고 작업했던 스즈끼복을 친구가 된 스즈끼상에게 주고 왔다. 담음에 갔을때 스즈끼상이 그거 입고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본다. 첫 일주일 간은 잘 몰랐지만 보름이 지나고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 오자 힘들었던 것보다 자꾸만 아쉬움만 밀려왔다. 비록 오타루에 오기위해 설 명절에 가족, 친지들과 함께 보내는 것은 포기했지만 너무나 특별한 만남들과 즐거운 경험들로 인해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겨울이 되었었다.

약 3주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오타루의 추억이 한국의 집에오니 마치 꿈이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지막 날과 집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써준 롤링페이퍼를 보며 지금도 가끔 오타루에서의 우리 오코보의 소중한 추억을 생각합니다.
오코보로 인한 인연 앞으로도 쭉~ 계속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그 사람들과 다시 함께 하고 싶습니다.’


<9기 박선유>

8월, 뜨거운 여름 날 삼척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합격의 전화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를 연신 외쳤던 합격의 전화! 그리고 8월 오리엔테이션. 경희대에서 있었던 오리엔테이션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어색하지만 반가운 인사, 오코보에 대한 설명, 그리고 뒷풀이까지 하루가 너무 길었던 오리엔테이션 날이었다. 1월 말 출국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있었다. 그 오랜 시간만큼, 계절도 여름에서 겨울로 바뀌어 있었고 그 사이에 오리엔테이션도 있었고 지역별 멘토링 행사도, 체육대회도 있었다. 그리고 1월 총 MT! MT에서 내가 일본에서 함께 활동할 조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었다. 한 지역도 아닌, 전국 각지에서 모인 우리는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설상 회의도 하고 장기자랑 준비를 하고 있었다. 또한 오타루라는 공통의 주제가 생기면서 우리가 친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2주 뒤, 출국! 그 사이에 조 사람들과는 꾸준히 연락하며, 준비물도 챙기고 먹을 음식도 챙기고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을 붙잡고 우리는 인천공항에서 만났다. 사진도 찍고, 영상도 찍고, 짐도 나누고 그리고 우리는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맡겼다.

정확히 일본에서 보낸 시간은 18박 19일이다. 그리 짧지만은 않은 시간. 하지만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 갔다 오고 난 뒤엔, 긴 꿈을 꾸고 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진짜 오타루에 갔었나?’라고 할 정도로 긴 꿈 같았던 시간. 평생 볼 눈은 다 본 듯한 눈의 나라, 통나무 집의 윈켈까지. 한국에서의 모든 현실은 잊고 지냈던 18박 19일.
가족처럼 매일 아침에 같이 일어나고, 아침밥을 먹고, 버스를 타고, 나가서 설상을 만들고, 어떻게 하면 설상을 더 예쁘게 할 수 있을까, 하루의 일을 계획하고,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고, 오늘 밤엔 무엇을 할까, 내일은 어떤 즐거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하루하루 즐거운 것만 생각했다.

“도대체 뭘 했길래 그렇게 즐거웠니?”라고 물어본다면, “이거요!”라고 할만한 건 없다. 그저 서로 같이 있는 것이 좋았고, 편의점에서 사먹는 아이스크림 하나가 좋았고, 나가사키야에서 팔던 도시락 고르는 일이, 오늘은 누가 먼저 씻을지 정하던 일, 오늘 하루 서로의 느낌을 물어보던 일, 조장 회의 하던 일, 온천은 누가 갈지 정하던 일, 버스 누가 먼저 타고 나갈지 정하던 일,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 지 기대하며 잠들던 그 순간이, 잠들기 전에 보이는 윈켈의 천장이 좋았다.

설 연휴가 껴서 놀러오신 ob 상운오빠, 충기오빠가 왜 그렇게 잠깐 잠을 자는 것을 아까워했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잠깐 잠을 자는 것 조차 아까울 정도로 오타루에서의 24시간은 24시간 내내 추억을 만들어 내는 시간이었다. 나와 함께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이 50 여 명이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즐거운 일이다. 우리는 여전히 오타루의 사진을 보고, 또 그 시간을 이야기한다. 이건 아마 겨울이 되면 더 심해질 것 같다. 이게 오비분들이 이야기 하시는 ‘오타루앓이’인가 보다.

벌써 그 운하가 보고 싶다. 전망대라고 하기 민망한, 시로이 고이비토 전망대에서 타코야끼를 먹으면서 바라보던 축제 첫날의 그 운하, 그때의 느낌은 정말 잊을 수가 없다. ‘아, 내가 여기에 와 있구나.’를 느끼게 했던 그 순간. 좋은 사람들과 함께여서 더 즐거웠던 그 순간,



<9기 서성민>

#1. 오타루에서의 따뜻한 겨울
겨울은 따뜻한 계절이다. 왜일까. 겨울엔 매서운 추위가 몸과 마음을 위축시키지만, 그래서 더더욱 사람의 체온이 그리워진다. 온 세상이 ‘뜨거운’ 여름엔 사람과 가까이 하기가 꺼려진다. 반면에 추운 겨울엔 사람이 가진 ‘따뜻한’ 체온이 그렇게 간절하고 소중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겨울 내내 사람과 몸을 맞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오코보 활동의 대부분은, 바깥에서 매서운 추위에 바들바들 떨었던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인간은 힘들고 괴로웠던 때보다 간절하고 소중했던 순간을 선택적으로 기억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추억하고 회상하는 과거의 겨울은 따뜻하게 기억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그 당시에 실제로 따뜻한 시간이 더 많았는지 어땠는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내 기억속의 오타루의 이미지가 ‘따뜻함’이 우세적으로 남아 있는 연유도 이 때문이다. 불완전한 내 기억의 증언에 의하면, 오코보 사람들과 함께 했던 오타루는 참 따뜻했다. 그보다 더 따뜻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것은 조금 조작된 기억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렴 어떤가.)

#2. 하얗고 맑은 곳, 아사리가와
우리는 아사리가와 마을의 ‘윈켈’(나중엔 차츰 다들 그냥 ‘집’이라고 불렀다)이라는 이름의 나무로 지어진 근사한 공간에서 지냈다. 아침에 커튼을 젖히면 새하얀 눈이 훌륭한 조명이 되고, 밖에 나가 심호흡을 한번 하면 신선한 공기가 훌륭한 비타민이 되어 주는 곳. 이 곳의 공기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그 맛있는 공기에 중독된 나머지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습관처럼 바깥 공기부터 마시러 나갔다. 오타루에서의 내 경험에 의하면, 이렇게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살면 인간은 하루 3시간의 수면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공기 중에 산소의 비중이 더 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밤에 눈이 오는 걸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게 좋았다. 가끔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혼자 청승맞게 흘리던 눈물의 출처는, 언젠가 여기를 떠나야 한다는 서글픔 때문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 눈물의 출처는 아마도,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감격 또는 고마움에 가까웠던 듯하다.

#3. 창작의 즐거움
오타루 눈빛거리축제는 설상을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만든다. 거리의 성격에 맞는 주제에 맞춰 설상을 만들기도 하지만,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만들 기회가 의외로 더 많이 주어졌다. 못 만든다고 나무랄 사람도 없고, 잘 만들었다고 상을 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점이 오히려 창의성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 외부적인 보상 보다는 내적인 만족(스스로 즐겁고 재미있는 것!)을 위해 일할 때, 인간의 사고는 유연해지고 창의적이 되는 것 같다. 여럿이서 무언가를 열심히 창작하는 경험은, 협동심을 기르는 동시에, 그동안 있는지도 몰랐던 내 안의 예술가적 면모를 발견하는 즐거움이기도 했다.


<9기 조일제>

오타루, 내 겨울의 조각들.

  오타루에서 돌아온 지도 어느덧 세 달이 훌쩍 지났다. 이렇게 돌아보면 문득 그 때가 멀리도, 가까이도 느껴진다. 가장 많이 변한 것이라면 계절이 아닐지. 그 겨울의 눈이 녹듯이 우리가 함께했던 기억들도 차츰 무의식에 잠겨가지만, 아직도 내 일상에 그 때의 강렬했던 느낌만은 남아 그곳이, 서로가 못내 그리워지는 날들이 있다. 그럴 때면 조금씩 희미해진 기억을 되살려보려 내 손에 남은 추억의 단서들을 꺼내보곤 한다. 오타루에서 쓴 나에게 보내는 편지, 사진, 아주 사소한 영수증들까지도. 그것들은 내 수첩에, 좁은 방 안에, 매일같이 펼쳐보는 다이어리에까지 자리해 지금도, 내 추억의 조각이자 그리움의 조각으로 깊숙이 박혀있다.

1. 출발_
  2시까지 인천공항으로 모이기로 한 날. 하루에 두 번 밖에 없는 진주-인천공항 리무진 덕분에.. 난 새벽 5시 차를 타고 가 10시에 이미 도착을 해 있었다. 그 긴 시간동안 우연히 발견힌 ‘lucky’라는 노래. 정말 캡숑 짱.
  그리고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 우리 OKOVO 사람들. 아직은 조금 어색한 우리들. 이 때는 몰랐지 19일 뒤에 바로 이 곳에서, 서로 헤어짐이 아쉬워 눈물흘릴 줄.
  오타루와의 만남도, 우리의 만남도, 이 곳 이 때부터 이미 내 인생의 Lucky-!

2. Lawson_
  가장 흔하게 보이던 편의점. 밥을 먹고 후식을 사러. 일하러 가는 길에 군것질거리를 사러 자주 들렀던 곳. 덕분에 일본의 분위기를 조금은 느낄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그리고 라이터를 사러 가 머뭇거렸던 기억.
  “그.. 칙, 칙,..”
  “아~ 라이따!”
  “아.....그렇구나...”


3. 스시_
  자유시간에 혼자 돌아다니다, 오르골당 가는 길에서 발견한 10piece에 1,000엔 초밥집. 마침 식사시간도 아니어서 손님도 없고, 느긋하게 초밥과 맥주 한 잔을 함께 먹었다. 그 맛에 일어를 모르던 경상도 남자는 ‘맛있다’ 대신 ‘스.고.이, 오.이.시’를 남발했다.
  마치 처음으로 초밥을 먹어본 기분이랄까. 입에서 녹던 그 맛도 맛이지만, 타지에서 홀로 느낀 그 여유는 잊을 수 없는 홀가분함.



4. 오르골당_
  오타루 가기 전 얻은 오타루에 관한 몇 안 되는 정보 중에서도 관심을 끌었던 곳. 가보니 과연...  ‘이 곳은 꿈의 세상인가?’ 그 분위기며, 맑은 오르골 소리에 넋을 잃는다. 흠이라면 관광객이 너무 많다는 것?
  이로나에 교차로에서 요 앞의 메르헨 교차로까지 걷는 길도 우리는 ‘오르골당 가는 길’이라 불렀지. 그 길도, 마침내 당도한 이 곳도, 내겐 오타루의 분위기 그 자체.

5. 일본인_
  오타루가 마음에 든 이유를 꼽으라 한다면 아마... 눈과 도시의 풍경과, 그리고 오타루 사람들일 것이다.
  축제를 위해 일하는 우리의 모습을 본 어느 할머니가 OKOVO 측에 보내온 선물과 이 쪽지. 얼마나 따뜻한가...
  이 뿐만이 아니다. 신호등에 서있는 우리에게 OKOVO 냐고 물으시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연거푸 하고 가신 어느 할아버지, 발렌타인 초콜렛을 손수 한 명, 한 명 이름과 편지를 써 보내준 일본인자원봉사자 친구들, 발 시리겠다며 양말을 한가득 보내주신 할머니, Nagasakia에서 살며시 초코파이(?)상자를 건네주시던 할머니, 스파게티를 먹다 만난
‘전 Yukiakarinomichi 담당자 분’은 스파게티 두 접시와 콜라까지(그리고 지금은 한국인 교환학생에게 한국말을 배우고 계셨다.), 그리고 지금 당장 기억나지 않는 많은 사람들.
  그 친절과 웃음, 마음 덕분에 눈물겹게 따뜻했습니다.
<p.s.> 그리고 마지막 작업날 만난 할아버지. 자신도 백제의 후손이라며 우리는 한 핏줄이라고 말씀하시던. 그리고 솔직하게, 일본의 과거사 문제에 대해 사과를 하셨다.
  뜨겁게 꽉 쥐던 그 손, 손자 뻘의 우리에게 정중히 숙이던 그 인사, 진심이 묻어나던 사과.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우리 개인은 이다지도 쉽게 서로의 앙금을 내려놓았다.

6. Sapporo_
  자유시간의 첫 날, 우리 조 모두 삿포로 여행. 그리고 함께 한 Chiba 상.
  지방광역시에 해당하는 대도시. 확실히 큼직큼직하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어쩐지 (내가 기대했던)일본의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 도로 한 편에 쌓인 때묻은 눈을 보며 드는 생각,
  ‘오타루는 눈과 함께 살지만, 삿포로에게 눈은 그저 바쁜 일상의 장애물이겠구나..’
  수백 년은 되었음직한 나무들이 그득한 홋카이도 대학의 캠퍼스를 거닐고,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몇 십년 만에 이렇게 다시 학생식당에 와본다는 Chiba상. 우리는 그저 싸서(?) 찾아왔는데, 그 분에겐 추억을 되새겨본 시간이 되었나보다.
  삿포로 맥주박물관까지 함께한 후, 이제는 각자의 여행시간. 우리는 서로 목적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흩어져 삿포로의 거리를 누볐다. 그렇게 나와 병우 형은 다시 여유로운 거리 여행자. 삿포로 구청사, TV타워, 시계탑도 모두 지나며, 모레가 출국이지만 우리는 언제까지고 계속 일본을 여행할 것처럼, 그렇게 걸었다..

7. 이별.. 현실로 돌아가는 알람_
  윈켈을 나서는 내 손에 무거운 캐리어가 들려있다는 게 마음에 안 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거운 내 두발. 다시 올 수 있을까, 이 곳?
  아침 일찍부터 우리를 배웅하러 와 준 일본 사람들. 미노야, 스즈키, 츠다 상, 호나미, 유카리, 유이, 레이코..
  눈발이 흩날리던 신 치토세 공항. 공항 창 밖으로 펼쳐진 하얀 눈의 세상. 한국으로 돌아가 발을 내딛었을 때,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나지 않을 게 가장 어색할 것 같다.
  지금 눈 앞의 이 사람들도, 주위로 들리는 알 수 없는 일본말들도, 눈 앞의, 길 너머의 풍경을 꿈꾸고 기대하며 걷는 여행자의 호기심도, 이대로 정말 끝...?

8. 나에게 쓰는 편지, Otaru in Japan.
  Dear.
  오늘은 이 오타루에서의 마지막 밤. 이 도시의 낭만과 분위기에 흠뻑 취해있으면서 정작 일기는 쓰지 못 하고, 이제야 밀린 날들을 되새겨 쓰는 것을 용서하세요.
  처음 이곳에 왔던 날, 버스 창 밖으로 뿌옇게 낀 안개가 몰아치는 눈보라라는 걸 알았을 때, 이곳, 정말 ‘러브레터’의 도시가 맞구나.. 생각했었죠. 둘째 날 오타루 견학을 하며 보았던 그 하얀 세상은 정말..
  쏟아지는 눈 속에 서서 내가 했던 생각은 오직, ‘여기 살고싶다.’ 아니, ‘여기 살 것이다.’
  지금은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입니다. 오타루를 떠나는 심정이 출국과정의 복잡함 때문에 조금은 담담해져버린 것 같지만, 이 글을 쓰며 다시금 되살리고 있어요.
  처음 치토세 공항에 도착해서 사진을 찍던 게 정말 어제 일만 같은데, 어느새 돌아가는 길 위에 서 있네요. 이렇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떠나려 할 때면 늘, 꼭 다시 돌아온다고 다짐하는데, 현실로 돌아가면 쉽지가 않죠.
  당분간 여운이 꽤 클 것 같네요. 추억 속에 묻혀 잠시 지내렵니다..

9. 19일 전으로_
  인천공항.. 다시 19일 전으로.. 성민이 형이 한숨처럼 내뱉은 ‘아사리가와..’라는 말을 듣자 소름이 끼쳐온다. 정말... 정말 내가 그곳에 있다 온 게 맞나?
  정말로, 그 1월 30일의 출국날, 오전 10시에 공항에 도착해 사람들을 기다리다 잠이 들어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다.
  우리의 집이 있는 이곳, 동화는 끝이 나고 모두들 현실세계에 다시금 발을 디뎠다. 그 허전함과 또 한 번의 이별에 어쩔 줄 몰라 서로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려내린다.
  이 소중한 사람들아, 이 소중한 추억들아...
  행복했어, 고마워..



<9기 최종경>

2월의 러브레터, 새로운 감동의 길을 걷다.

1.
내가 OKOVO가 되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은 영화 한편 때문이였다.
너무나도 유명한 그 영화....러브레터...

한국에서는 "오겡끼데스까~?"하면 모두들 알 것이다.

1999년 쯤에 아마도..그 영화를 본 것 같다. 아마 10년 전 쯤이였을 것이다.
감독 이와이 슈운지는 촬영지 오타루에서 영화를 찍고 싶진 않았을 것 같다.
몇 몇 번역된 한국판 러브레터를 보더라도 오타루라는 지명 대신 "일본의 어느 북쪽 도시"같은 것으로 동화적 상상을 더해 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동화적 상상을 채우기에는 오타루 만한 곳이 없다. 그것은 분명하다.
직접 가보면 왜 그런지 그 이유는 알 수 있을 것이다.


2.
영화 러브레터를 좋아하고 삿포로 맥주를 좋아한다고 솔직히 쓴 자기 소개서가 우연히 합격했다. 너무 너무 좋았다.  죽기 전에 러브레터 촬영지는 꼭 가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오래~다녀올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8월 OT를 하고 기억이 흐믈흐믈 해 질 즈음~ 2011년 1월에 MT를 하면서 "우리 조"라는 것이 생기고 드디어 출발 하게 되었다.
솔직히 출발 전 날까지도..정말 실감이 나지 않았다.

3.
오타루에서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정말 조금만 걸으면 촬영지고 도시 전체가 영화였다.
우리가 생활하는 Winkel이란 곳 또한 그러했다.
친구는 우리 숙소 Winkel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 "정말 어릴 때 소꿉놀이 할 때 생각했던 그런 집이다"라고 1층엔 주방 및 생활공간, 2층엔 여자숙소 3층엔 남자 숙소였는데,
아직도 창문을 열고 맡던 상쾌한 바람은 잊혀 지지 않는다.

OKOVO를 통해서 가면 수 많은 장점도 있지만 단점 또한 많이 있다.
가장 큰 단점이 "일을 해야 된다"는 점이다.
"축제를 도와준다는 의미여서 목적성을 가지고 일을 하면 일에도 의미가 있고 재미있겠다!!"라고 생각 할 수도 있으나 사실 일은 고단하다. 아침부터 일어나서 저녁까지 설상을 보수하고 촛불을 켜고쉬운 일이지만 15일 가량을 작업하려면 굉장히 힘든 점이 사실이다.
여성의 경우는 더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일하면서 같은 조원끼리 몰래 몰래 눈싸움도 하고 타국에서 같이 이야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며 다니는 이런 소소한 재미들이 이런 일들을 견딜 수 있게 만들었다.
당신은 편하게 놀다만 온 추억이 기억에 남는가? 아니면
정말 친구들과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던 추억이 기억에 남는가?

나는 솔직히 러브레터 촬영지에서 단순히 오래 지내기 위해 이 단체에 지원한 것도 있었지만.. 그 이상에 많은 것을 얻었던 것 같다.

몸은 더 고단했지만 밤새 맥주 한 잔하면서 더 많은 면에 오타루를 보았고 밤에 놀러온 일본 사람들과도 서투른 말이지만 이야기 하면서 친해 질 수 있었다. 혼자 여행왔으면 느끼지 못했을 감동도 많이 받았다.
  
만약 고민하고 있을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당신은 여행을 할 것인가? 생활을 할 것인가?

생활은 여행만큼 로망스럽거나 환상이 크거나 좋은 모습만을 보여 주지 않는다.
하지만 생활은 진심이고 그대를 더 성장시키게 만들고, 그 추억 또한 진짜가 될 것이다.


힘들었지만 꼭 다시 한번 가고 싶다고 OKOVO인들은 항상 애기한다.
나 또한 그렇다.

기회와 시간이 허락 된다면 2012년 축제에도 꼭 참가해 보고 싶다.

4.
활동을 다녀와서 같은 조 사람들을 위해 UCC를 제작하였다.
마지막에 이렇게 적혀있다.

"우리의 여정은 끝이 났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나는 아직 OKOVO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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